노비의 신분으로 상호원(정4품)까지 오른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세종대왕의 재위기간(1418년 8월∼1450년 2월)에는 실로 방대한 과학사업이 세종의 명에 의해 행해졌다. 그러한 사업에 주류를 이루었던 분야는 물론 천문학 및 역학분야이다. 농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여 온 천문학, 역학은 4계절을 정하고, 1년간 할 일을 규정하는 사업으로써 제왕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 되어왔고, 그런 이유로 해서 정부, 즉 왕이 관할하는 과학분야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살펴 볼 때 신분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지 않고서는 좀처럼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미천한 신분, 가장 천대받던 노비의 신분으로 과학기술과 응용에 탁월하여 놀랄만한 기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영실(將英實)은 조선조의 과학자로서 기생의 소생으로 태어난 장영실은 경상도 동래현의 관노 출신이라고 전해지는데 그 때문인지 정확한 출생일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적부터 아주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전해진다. 사물에의 관찰력 또한 뛰어났으며, 기계의 원리 파악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고, 기계 등을 만들고 고치는 일에 능통했으며, 무기나 농기구를 제작하고 수리하는 등 금속을 다루는 일에 능숙했다고 한다. 장영실은 비록 관노 출신이었으나 그는 탁월한 재능을 어려서부터 발휘하여 주위로부터 인정받았고, 한양의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세종의 부왕인 태종 때 발탁되어 궁중에서 일하게 되었다.
   장영실이 관직에 오르게 된 것은 태종 때가 아닌 세종 때였다. 세종은 제련 및 축성, 무기, 농기구의 수리에 뛰어난 장영실을 가까이 두어 자신이 반드시 이루고자 했던 사업중의 하나인 천문의기 제작사업을 비롯한 과학진흥사업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신분제가 행해지던 당시에 노비출신인 자를 궁중에 두어 관리로 중용케 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기에 모든 문무 대신들의 반대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장영실과 같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대신들을 설득하여 결국 장영실을 채용하였다. 장영실이 오른
상의원 별좌라는 직책은 임금의 의복을 만들고 대궐안의 재물과 보물의 관리를 맡아 관리하던 관서로써 태조 때 세워진 것이다. 그 이후에 상호원으로 진급하였다.

  『안승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에게 의논하기를,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디 원(元)나라 소항주(蘇杭州)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하여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다. 장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이 글은 왼쪽의 글을 번역한 것으로 장영실의 출생과 그가 관직에 등용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기록된 「세종장헌대왕실록」권 61에 수록된 내용이다. 

   장영실이 발명한 것들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혼천의 그리고 자격루이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이다. 중국에서는 서기전 2세기 경에 만들어졌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후기부터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 14년(1432) 왕명을 받아 정인지와 정초에게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과 장영실이 그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재료로 목재를 사용하였으나 뒤에는 구리로 제작하였다.
   아래 그림과 같이 혼천의의 혼(渾)은 둥근 공을 말하는 것으로서 동심다중구(同心多重球)를 의미한다. 구조는 세겹의 동심구면으로 되어 있는데, 제일 바깥층에서 중심으로 지평환(地平環) 자오환(子午環) 적도환(赤道環) 등 세개의 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각 층의 각 환에는 필요한 수의 눈금을 표시하여 정확하게 관측하였다. 혼천의는 아침 저녁 및 밤중의 남중성(南中星), 천체의 적도좌표 황도경도 및 지평좌표를 관측하고 일월성신의 운행을 추적하는 데 쓰였다. 이것은
천문학의 기본적인 기구로서 조선시대 천문역법 (天文曆法)의 표준시계와 같은 구실을 하게 되었다.


세종시대에 중국은 송(宋)나라였는데 당시 송에서는 자동시보장치 물시계가 있어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조선에 이러한 기기가 없음을 세종은 항시 안타까워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물시계가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이다. 그 당시에 물시계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이다. 더군다나 평범한 물을 이용 이를 시간측정에 적용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랍다. 물은 우선 비중이 1이다. 모든 물질중 기준이되며, 부피, 무게를 측정하는데 다루기쉽고, 언제나 우리주위에서 쉽게 구할수가 있어서 재충전 또는 보충이 가능하다. 과학적이고, 수리적인 이 계측기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물시계는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종, 징, 북을 저절로 치도록 만든 자동 물시계로는 조선 초 세종때 장영실의 자격루가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 16년(1434)의 자격루는 그대로 보존되지 못했기 때문에 중종 31년(1536)에는 다시 자격루를 만들 었는데, 그 일부가 지금 여기 남아 있는 것이다. 세종 때 장영실의 자동 물시계에 대해서는 유물이 남지 않았지만 자세한 설명이 전한다. 한편 중종 때의 자격루는 여기 일부가 남아 있지만, 그 상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둘은 상당히 비슷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제일 위에 있는 물 보내는 큰 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 주면, 그 물은 아래의 작은 물 보내는 그릇을 거쳐 같은 시간에 같은 양의 물이 제일 아래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는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알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 준다. 이 쇠구슬은 다른 쇠알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 징, 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 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이 유물은 쇠구슬이 굴러 조화를 일으키는 부분은 없어진 채 지금은 물통부분들만 남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된 자동 물시계 유물은 세계적으로 귀중한 과학문화재이다. 지정번호는 국보 229호, 정확한 명칭는 보루각자격루, 지정일은 1985.03.03에 등록되었다. 소재지는 서울시 중구 정동 5-1 덕수궁내 재료,재질은 청동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