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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핵무기개발 책임자인 이휘소 박사가 미국의 정보기관요원에 의해 암살된다. 하지만 미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이 민족공동체로써 함께
힘을 합쳐 핵무기를 개발한다. 그리고 '원자탄'이나 '핵무기'하면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되는 일본이 우리민족이 터전인 한반도를
침략하자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핵미사일을 그들의 심장을 향해 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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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한반도의 38선 이남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였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의
대강의 줄거리이다. 이 책이 발간되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던 94년, 북한의 핵시설의혹과 이에 대한 미국의 선제기습공격계획, 서울정부의 대북강경정책과 평양의 서울 불바다발언으로 한반도의
긴장은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활시위처럼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당시 세계사회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라는 냉전시대의 낡은 구도가 무너지고 난
뒤였음도 한반도에는 시대착오적인 일촉즉발의 긴장상태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휘소 박사는 입자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와인버그는
그 공의 대부분을 같이 연구하던 이휘소 박사에게 돌릴
정도였다. 흔히 이휘소 박사는 그의 뛰어난 재능 때문에
이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
역시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의 결과'라는
에디슨의 말과 같이 남다른 노력의 소유자였다.
대학에 다닐 때는 책에서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하면 일주일 내내 조사한 끝에 책의 틀린
부분을 찾아낼 정도로 집중력과 끈기가 있었다. 초기
유학 시절에는 인종적인 편견으로 실험실마저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으나, 밤을 세워가며 성실하게 노력한
끝에 인정을 받고 훌륭한 연구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70년대 네 번째 쿼크인 참(charm)쿼크의 존재가
예언되었을 때 입자 탐색과 관련된 이론적 연구 업적은
노벨상 수상 감이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휘소는 1935년 1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화학 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후,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전과가 되지 않아 주한미군의 도움으로 1955년 2월 오하이오주에 있는 마이애미 대학 물리학과에 등록함으로써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미국에 온지 1년 6개월 후인 1956년 6월 수석으로 마이애미대학을 졸업하고, 피츠버그 대학원(University of
Pittsburgh)으로 옮긴다. 여기서 프랭클린 벤자민의 자서전을 읽고 감동하여 Benjamin W. Lee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박사과정은 펜실베이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으로 옮겨서 받는다. 학위를 받고나서 1966년까지
펜실베이니아 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있게된다. 1961년 이휘소는 프린스턴고급연구소(Princeton, Institute of Advanced
Study) 정회원겸 연구원으로 들어간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1962년 5월 7일 중국계 미국인 심만청과 결혼하여 이후 1남(천)
1녀(안)을 둔다. 1966년부터 1973년까지 뉴욕주립대(Stony Brook) 교수를 거쳐 1973년 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의 이론물리학 초대 전임부장에 취임하였다. 곧 Chicago 대학의 교수도 겸임하였다. 소립자
물리학자로서 우수한 논문을 많이 발표했고 연구활동이 절정기에 이르러서 세계의 주목을 크게 받고 있을 때, 1977년 6월 16일 향년 42세로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타계하셨다. 이휘소 선생의 타계 후 2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한국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에서 이휘소는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철학과는 무관하게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중반 주한미군 철수정책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데 마치 이휘소가 이 사업에 깊숙이 관여한 중심인물이어서 미국 정보기관이 교통사고를 가장하여
암살했을 가능성이 사고 당시 언론에 제기된 적이 있었다. 1989년에는 "핵 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책이 출판되어 이를 기정사실화
하였다. 1993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베스트 셀러로 등장하면서 사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비록 픽션이라는 단서를 달았어도 뼈대는
사실이라며 주인공으로 가명을 썼어도 이휘소의 작품명이라는 등 그럴듯하게 꾸며대었다.
널리 알려진 바처럼 핵무기 개발은 소립자물리 이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핵무기 개발 초기단계에서는 핵반응 산란단면적 등 과학적 데이터가 중요하였기에 핵 물리학자들이 참여했으나 이들은 이미 공개된
과학정보이고 핵무기 개발의 핵심은 핵연료 농축 등 제작공정과 관련된 기술이기에 그와는 더욱 무관한 것이다.
이휘소의 개인 소유
학술자료는 북경대학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북경대학에는 도서관에서 흔히 보는 학술지 인쇄본이 기증되었으며, 유품 중 연구일지, 연구노트,
개인장서 등 귀중한 자료는 1991년 미망인 마리안 여사가 고려대학 도서관에 기증하여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강주상 교수는 기증 자료들을
인계하기 전 세밀하게 검사하였으나 한국정부와의 접촉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
1974년 서울대 AID
차관 심사 때에도 주위에서 한국정부는 미워도 한국의 과학발전을 위해서는 도와야 한다라는 한국인 동료 과학자들의 조언 때문에 마지 못해 응했다는
것이다. 그 후 생각이 바뀌어 1978년 동경에서의 고에너지 국제학술회의 직후 여기에 참석한 세계 석학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학술회의를 열 수
있도록 가까운 해외 한인 동료들과 추진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가 계획했던 1978년 서울에서의 물리학 국제학술회의는 이휘소
추모 학술회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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