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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새로운 실험기구 없이 연구를
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나는 새 기구(가속기) 없이는 더 이상 연구를 진행시킬 수 없는 한 계에 도달했지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원들 모두의 눈에도 고에너지로 가속된 양성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넓은 공간, 더 많은 예산, 그리고 특히
새로운 기술을 필요로 했습니다. 즉 더 복잡한 기구가 필요했다는 말인데, 러더포드는 복잡한 기구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아주 간단한
실험기구만으로도 많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연구소에 크고 복잡한 기구가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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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가 캐븐디쉬연구소를
떠났던 주된 원인입니다... 내가 이 문제를 러더포드와 논의했다면 곧 커다란 다툼으로 번졌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떠났던 것입니다.” (1969년 인터뷰에서)
자신을
믿고 키워온 스승을 배반한 배은망덕에 대한 회고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채드윅은 원자 물리학의 발전을 위하여
입자 가속기의 건설이 너무나 절박했었다. 1937년 러더포드가 갑자기 사망했을 때 가장 슬퍼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채드윅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존경했던 스승과 끝내 완전한 화해를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중성자의 발견은 그 자체가 복잡하고 드라마틱한 역사이다. X선처럼 하루저녁에 발견된 다른 주요 발견들과는 달리 중성자가 발견되기까지는 2년이나
걸렸다.
퀴리부부가
행한 실험에서 무시되었던 실험적 사실과 러더퍼드가
예언한 중성자에 대하여 채드윅은 주목하고 있었다.
1919년
러더퍼드는 폴로늄에서 방출되는 α입자를 질소 원자핵에
충돌시켰을 때에 양성자가 방출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질소 원자핵이 산소 원자핵으로 변환된 것으로
설명되며, 최초로 성공한 원소의 인공 변환이다. 러더퍼드
밑에서 연구하던 채드윅은 1930년 베릴륨과 α 입자들이 충돌했을 때 파라핀에서 양성자를 방출시킬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입자가 나타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론적으로 확실한 해석을 얻을 수 없었던 채드윅은 실험을 반복하여 마침내 이것을 양성자와 질량은 거의 같으나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로 해석하였다. 채드윅의 해석은 에너지 측정에 의하여 입증되었으며 여러 다른 종류의 표적에서 얻은 실험 데이터에서 그는 중성자의 질량을
계산할 수 있었다. 전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중성입자인 중성자는 원자핵 안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고, 핵반응을 일으키기에 가장
유용한 입자라는 것이 페르미에 의해 증명되었다. 양성자들과 중성자로 이루어진 원자핵의 개념은 원소들이 왜 질량 증가 순서대로 배열되는지,
원자량이 원자번호 보다 빨리 증가하는지를 설명해준다.
1932년 채드윅의 중성자 발견은 핵변환 연구에 커다란 변환점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고, 물리학자들은 중성자의 발견에 의해 비로소 진정한 핵물리학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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